Jiwon Lee

이진선 《사랑스런 나의 방해자들》 — 전시 서문

본고를 맡기며, 작가는 사진 몇 장을 같이 동봉했다. 집 한편에 자리를 차지한 작은 작업실, 아이는 그 공간 가운데서 한껏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엄마 옆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천진난만하게 노닌다.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방해자다. 분명 작가는 이 제목에 애틋하고 성가신, 양가적인 감정을 조심스레 담았으리라. 이처럼 이번 전시는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역할 뒤로 감춰져 버린 것들을 위한 이야기다.

설치 작업 <사랑, 그 정성의 끝없는 반복>(2024)에서 이진선은 매일같이 아이를 위해 만들었던 이유식을 작업으로 가져오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노동을 숙고해보게 한다. 그가 육아를 하며 정성스레 만들었던 이유식들은, 아기자기한 보석 같은 입방체 형태로 단단하게 굳혀져 등장한다. 이렇게 다분히 키치스러운 상품처럼 변모한 음식은 가내수공업적 생산물로서의 지위를 보란 듯이 드러내고 있다. 아이를 위한 음식, 모성이나 사랑이라는 단어를 앞세우기 이전에, 그것은 분명 노동에 의한 산물인 것이다. 성과나 숫자로 치환할 수 없는 그 노동은 신성한 ‘헌신’과 같은 표현으로 포장되어 노동 주체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기도 하는데,1 사회 속에서 제도화된 ‘모성’은 여성을 ‘어머니’라는 헌신적 존재로 호명(呼名, interpellation)하면서 신화화하는 까닭이다. 어머니의 이름은, 그곳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의 복잡한 측면들을 가리길 요구한다.

반면, 또래 집단으로부터의 배제, 사회적 고립감, 낯선 공동체, 흐릿해진 꿈, 자유에 대한 갈망 등 억압된 감정들을 직관적인 이미지로 나타낸 이진선의 회화는, 무한한 헌신과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엄마—와 상충하는 고민 많은 불완전한 존재—아이—로서의 작가 자신을 병치해서 보여주는 드로잉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거친 목탄, 아크릴과 콜라주는 마치 손끝의 감각에 골몰하는 아이의 낙서처럼 어떤 몸의 언어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모성에 감춰진 노동과 마찬가지로,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노동의 지위를 미술 또한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작업이란 작가의 정신적·육체적 노동적 산물이고, 작가란 삶의 매 순간에서 그 노동의 당위성을 찾는 이들이다. 육아일지를 악보로 기호화하고 그것을 다시 음악과 퍼포먼스로 변주했던 조영주나, 임신한 몸 자체를 작업으로 육화했던 김도희를 비롯한 많은 이들처럼 말이다. 그들의 작가적 주체는 엄마라는 이데올로기 앞에서도 소멸하지 않았고, 한층 더 날카롭게 정치화되었다. 이진선의 앞으로의 작업들 역시 왜 미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스스로 끝없이 되뇌어나가는 여정이 되길 바란다.


  1. 이지하, 「여성주체적 소설과 모성이데올로기의 파기」,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9 (2004):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