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작가 A와 식사를 하던 중 일민미술관의 전시에 대한 화제가 나왔던 것 같다. 전시에 대한 그의 작은 불만은 《히스테리아 :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라는 타이틀에 붙은 부제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가 너무 과하다는 것으로, 전시 참여 작가 대부분이 서울대, 홍익대 등 수도권 출신들인데, 그들의 작업만으로 동시대 리얼리즘을 논할 수 있냐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동시에 전시를 꾸린 학예사들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어쨌거나 그들 역시 전시서문을 통해 ‘제도화된 리얼리즘’을 복기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가. 미술관의 역할은 동시대미술의 기준점을 잡는 것(제도화)이기에, 작업 세계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어 드러나고, 비평에 많이 노출된 작가들의 작업에 포커스를 맞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평은 미술관이 아니라, 그곳에 이르기 전의 전시공간, 대안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문제는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에서 대안공간과 미술 비평은 이미 전멸하다시피 되었다는 데 있다.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어떤 예술적 문화적 격차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건 실험적 공간과 비평의 부재에 기인한다.
이번 《히스테리아》전시에서 눈에 띄는 작가는 김혜원(b.1993)과 조효리(b.1992)이다. 특히 조효리는 작년 을지예술센터에서 전시됐던 작업 <부츠 Boots>(2020)를 본 이후 계속 지켜봐왔던 작가였다. 김혜원이 카메라 렌즈를 통한 응시, 그리고 그 렌즈에 의해 왜곡된 투사를 재현의 대상으로 마주하는 반면, 조효리의 언어는 조금 다르다. 그의 작업은 초현실주의와 극사실주의, 차용미술의 회색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미끈한 질감—이 질감은 3D 오브젝트의 가장 기본적인 텍스처 머티리얼(material)들을 연상시킨다—의 부츠 오브젝트들을 그린 <부츠>, 충돌(collision) 좌표를 잃어버린 검은 고양이들의 상이 겹쳐져 나타나는 <네오의 고양이 Neo’s Cat>(2023), 지난 세기 도널드 저드(Donald Judd)의 추상적 투쟁을 가져와 뒤샹(프레임)과 백남준(제목)의 형식만을 다소 장난스럽게 노골적으로 차용해서 평면에 압축시킨 <굿이브닝 미스터 저드 Good Evening, Mr.Judd>(2022) 세 작업들의 양상은 각각 다른 가지로 뻗어있으면서도 공통된 리얼리즘(환영주의)의 형식미를 유지한다.
작가는 자신의 치밀한 회화적 기술을 낡아보이지 않게끔 드러내는 영리한 자세를 취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컴퓨터에 의해 만들어진(렌더링) 이미지를 그대로 캔버스에 투영함으로써, 물질의 질감과 3차원적(x,y,z) 공간에 관련된 비현실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아마 이게 그가 말하는 어떤 ‘환영’을 가시화하는 것과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다. 그의 평면 회화를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리얼리즘 회화에서 사진을 찍고 그것을 캔버스에 옮겨 담는 방식이 이미 너무 보편적인 생산 양식이 되었듯,1 모델링된 렌더링 이미지를 평면의 캔버스에 옮겨 담는 발상 역시 그렇게 새로울 게 없음에도, 작가가 갖고 있는 회화적 기술이 워낙 뛰어난 까닭에,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마치 모니터의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의 회화는 어떤 환영주의적 몰입의 비매개 순간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것의 매체가 인지되는 하이퍼매개의 감각을 수반한다. 그러니까, 그의 작업이 어떤 그림으로 보이지 않고, 픽셀로 만들어낸 화면인 것 같은 탓에, 외려 더 그 작업 매체가 회화라는 사실이 뇌리에 박히는 것이다.
그 평면성을 인지함으로써 관람자는 ‘왜 재현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닿게 된다. 지난 세기 사진과 영화 등 새로운 재현 매체의 등장으로 회화가 더이상 세계의 민낯을 드러내는 의무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디지털 미디어를 포함한 새로운 매체들을 다시 한번 그림그리기 행위의 재료로 복속시킴으로써 그리기 행위, 회화 충동을 끈질기게 지속시키고 있는데, 대체 이 추동(趨動)은 어디서 오는걸까. 어쩌면 그림그리기란, 인간의 본연의 어떤 원초적인(primitive) 부분과 연결되는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크면서 언어를 익히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낙서를 하는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듯, 우리를 둘러싼 기술과 생활양식이 아무리 계속해서 달라질지라도 사피엔스의 뇌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드로잉과 회화는 지속될 것이다. 매체특정성(medium specificity)의 신화는 해체되었어도, 캔버스라는 평면 매체가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다만 그것이 ‘동시대미술’의 범주에 어디까지 포용될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며, 결국 회화를 둘러싼 비평이 시대와 어떻게, 얼마나 상호작용할 수 있을지의 문제다. 하지만 조효리의 회화를 보고 있자면, 어떤 지나간 철학들에 스스로를 맡기고 표류할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는 재료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와 그 기술 교육에 몰두하는 길만이, 동시대미술에서 회화 작가들 앞에 놓인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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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이용해서 작업하는 리얼리즘 화가들은 보통 사진과 현실세계의 간극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그것에 개입하여 작업한다. ↩